역사이야기

서기 400년, 광개토대왕: 신라를 구원하고 한반도의 질서를 세우다

설쌤의 역사이야기 2025. 8. 4. 21:00

서기 400년, 한반도는 한 위대한 정복 군주의 발아래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고구려 제19대 국왕, '영락(永樂)'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며 스스로 천하의 중심임을 선포한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의 시대였습니다. 그의 이름 '광개토'는 '넓게 영토를 개척한다'는 뜻으로, 이름 그대로 그는 한반도를 넘어 만주 벌판까지 아우르는 대제국 건설의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특히 서기 400년에 단행된 신라 구원 전쟁은, 고구려가 한반도 내부의 질서를 재편하는 '중재자'이자 '지배자'의 위치에 올랐음을 만천하에 과시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습니다.



30여 년 전, 할아버지인 고국원왕이 백제의 칼날에 비참하게 전사했던 치욕을 겪은 고구려에게 이 시기는 복수와 영광의 시간이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즉위하자마자 남쪽의 백제를 거세게 몰아붙여 항복을 받아냈고, 이후 백제-가야-왜(倭) 연합군의 침공으로 멸망 직전에 놓인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길에 오릅니다. 한 군주의 결단이 여러 나라의 운명을 뒤바꾼 이 극적인 시기는, 우리 역사상 가장 역동적이고 광활한 기상을 뿜어내던 때로 기억됩니다.



영락(永樂) 대왕, 정복의 시대를 열다

391년,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광개토대왕은 즉위 초부터 남다른 기백을 보였습니다. 그는 먼저 할아버지의 원수인 백제를 향해 칼을 겨눴습니다. 396년, 수륙 양면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한강을 넘어 백제의 58개 성을 함락시키고 수도 위례성을 포위했습니다. 결국 백제의 아신왕은 성을 나와 광개토대왕 앞에 무릎을 꿇고 "이제부터 영원히 노객(奴客, 노예와 같은 신하)이 되겠습니다"라며 항복의 맹세를 해야 했습니다. 수십 년간 이어져 온 백제의 전성기가 막을 내리고, 고구려의 치욕이 통쾌하게 씻겨나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4년 뒤인 서기 400년, 역사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백제와 동맹을 맺은 왜군이 바다를 건너와 신라의 수도 서라벌(경주)까지 쳐들어와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입니다. 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신라의 내물 마립간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다급하게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 5만 명을 즉시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하도록 명했습니다. 이는 한 나라의 운명이 다른 나라의 손에 달려있음을 보여주는, 당시 고구려의 압도적인 위상을 증명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숨겨진 이야기] 역사의 증인, 광개토대왕릉비는 말한다

이 극적인 사건은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1600년의 세월을 견딘 거대한 비석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광개토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당시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습니다.

 

"영락 10년 경자년에 왜가 국경을 침범하여 (신라를) 신민으로 삼으려 하였다. (중략) 왕이 몸소 수군을 이끌고 토벌하여 (왜군을) 격파하고,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대가야) 종발성(從拔城)에 이르니 성이 곧바로 항복하였다."

 

 

이 비문은 당시 고구려군이 신라에 주둔한 왜군을 격파하고, 도망치는 이들을 쫓아 가야 지역까지 진격하여 연합 세력을 완전히 와해시켰음을 증명하는 명백한 1차 사료입니다. 이는 고구려가 한반도 남부에까지 직접적인 군사적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구원과 굴복, 강대국 아래 엇갈린 운명

고구려의 5만 대군이 남하하자 전세는 순식간에 뒤바뀌었습니다. 고구려군은 신라 땅에서 왜군을 몰아내고, 김해의 금관가야까지 추격하여 적을 섬멸했습니다. 신라로서는 멸망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준 구원군이었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신라는 약 50년간 고구려의 강력한 내정 간섭을 받는 '보호국' 신세가 됩니다. 고구려군이 신라의 수도에 주둔하며 사실상 감독자의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생존을 위해 강대국의 힘을 빌린 대가였습니다.



한편, 이 전쟁의 배후에 있었던 백제의 아신왕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고구려에 복수하기 위해 왜와 동맹을 맺었지만, 그 동맹군마저 고구려의 막강한 군사력 앞에 허무하게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는 복수를 포기하지 않고 403년, 자신의 아들(훗날의 전지왕)을 왜에 인질로 보내면서까지 재기를 노렸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405년에 한을 품은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서기 400년을 전후한 시기는 광개토대왕이라는 한 명의 영웅이 동아시아의 질서를 재편한 시대였습니다. 그의 정복 전쟁은 고구려에게는 최대의 영광을, 백제에게는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신라에게는 생존과 예속이라는 두 얼굴의 선물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시기에 형성된 삼국의 역학 관계는 이후 100년 가까이 한반도의 역사를 규정하는 틀이 되었습니다.



서기 5세기 초 주요 사건 도표

연도 (서기) 국가 주요 사건 비고
391년 고구려 광개토대왕 즉위, '영락(永樂)' 연호 사용 우리나라 최초의 독자적 연호 사용
392년 백제 아신왕 즉위 대(對)고구려 강경책을 펼침
396년 고구려-백제 고구려, 백제를 공격하여 58성을 함락시킴 백제 아신왕이 고구려에 항복하고 신하가 되기를 맹세함
400년 고구려-신라-왜 고구려, 왜의 침략을 받은 신라에 5만 대군 파병 신라를 구원하고 왜군을 격퇴, 가야 지역까지 진격
402년 신라 내물 마립간 사망, 실성 마립간 즉위 실성은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즉위한 왕
405년 백제 아신왕 사망 왕자 전지가 왜에서 귀국하여 왕위에 오름(전지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