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

서기 300년, 새 시대의 여명: 폭군을 몰아내고 이름을 세우다

설쌤의 역사이야기 2025. 8. 4. 15:00

서기 300년, 4세기의 문을 여는 이 시점의 한반도는 낡은 시대를 밀어내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는 거대한 전환기였습니다. 북쪽의 고구려에서는 신하들이 폭군을 몰아내고, 소금장수로 숨어 지내던 왕손을 찾아내 왕위에 올리는 드라마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남쪽의 신라는 '사로국'이라는 옛 이름을 버리고 '신라'라는 새로운 국호를 채택하며 국가적 포부를 천명했습니다. 격동의 시대, 삼국은 각자의 방식으로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를 향한 첫발을 내딛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중국 대륙의 극심한 혼란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통일 왕조였던 서진(西晉)이 무너지며 수많은 북방 민족이 국가를 세우는 '5호 16국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는 고구려에게 400년간 자신들을 억압해 온 한나라의 군현(郡縣) 세력을 완전히 몰아낼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힘의 균형이 급격히 재편되는 이 시기, 각국의 지도자들이 내린 결단은 이후 100년의 역사를 결정지었습니다.



고구려: 소금장수 왕자, 400년의 숙원을 풀다

서기 300년 직전, 고구려는 제14대 봉상왕(烽上王)의 폭정 아래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품이 의심 많고 잔인하여, 유능한 숙부를 죽이고 친동생마저 자결하게 만드는 등 공포 정치를 일삼았습니다. 선비족의 침략으로 백성들이 굶주리는 와중에도 호화로운 궁궐 공사를 멈추지 않아 민심은 완전히 돌아섰습니다. 마침내 300년 가을, 국상(國相) 창조리(倉助利)가 신하들과 뜻을 모아 쿠데타를 일으켜 봉상왕을 폐위시켰습니다.



[숨겨진 이야기]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국상과 숨어 지낸 왕손

창조리는 "어질지 못한 군주 때문에 백성이 고통받고 나라가 위태로우니, 이는 우리의 책임이다"라며 거사를 결심한 충신이었습니다. 그는 폭군을 몰아낸 후, 봉상왕의 칼날을 피해 숨어 지내던 왕손 을불(乙弗)을 찾아 나섰습니다. 을불은 선대 왕의 손자였으나, 신분을 숨기고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거나 저잣거리에서 소금을 팔며 비참하게 살고 있었습니다. 창조리가 그를 찾아내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그는 자신이 왕의 재목이 아니라며 몇 번이나 사양했다고 합니다. 이 파란만장한 삶을 산 소금장수 왕자가 바로 고구려 제15대 미천왕(美川王)입니다. 밑바닥 민중의 삶을 직접 겪은 그는 누구보다 백성의 고통을 잘 아는 군주였습니다.



왕위에 오른 미천왕은 폭정의 상처를 치유하고 곧바로 영토 확장에 나섰습니다. 중국의 혼란을 틈타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시작했고, 마침내 313년, 고조선 멸망 이래 400년 넘게 한반도 북부에 자리 잡고 있던 한나라의 마지막 군현, 낙랑군(樂浪郡)을 완전히 축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는 민족사적으로 엄청난 쾌거이자, 고구려가 한반도의 진정한 강자로 우뚝 서게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신라의 탄생: 새로운 이름에 담긴 원대한 포부

같은 시기, 동남쪽의 신라에서는 조용하지만 의미심장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제15대 기림 이사금(基臨尼師今)은 307년, 나라의 이름을 공식적으로 '신라(新羅)'로 확정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사로(斯盧), 서나벌(徐那伐), 계림(鷄林)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으나, 이제 하나의 통일된 국호를 사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삼국사기』는 '신라'라는 이름의 의미를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에서 따왔다고 설명합니다. 이는 "왕의 덕과 업이 날마다 새로워져, 사방의 인재와 영토를 모두 아우른다"는 뜻입니다. 작은 나라에 만족하지 않고, 장차 삼한을 통일하려는 원대한 포부가 이 새로운 이름 안에 담겨 있었습니다.



백제: 암살과 수성(守城), 안정을 택한 강자

한강 유역의 백제는 300년 전후로 아슬아슬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제10대 분서왕(汾西王)은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매우 용맹하여, 낙랑군의 서쪽 현을 빼앗는 등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습니다. 그러나 그의 활약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304년, 그는 낙랑군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하는 비극을 맞이합니다. 이는 당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관계가 얼마나 치열하고 무자비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분서왕의 아들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왕위는 다른 가문 출신인 비류왕(比流王)에게 돌아갔습니다. 비류왕은 선왕과 달리 무리한 영토 확장보다는 내치에 힘쓰며 안정을 꾀했습니다. 그는 312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는 등 외교를 통해 평화를 유지하려 노력했습니다. 이는 고구려가 급격히 팽창하고 주변 정세가 불안정한 상황에서, 힘을 비축하며 때를 기다리는 현명한 전략이었습니다.



서기 300년, 고구려는 폭정을 끝내고 영토 회복의 새 시대를 열었습니다. 신라는 새로운 이름과 함께 원대한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백제는 왕의 비극적 죽음을 딛고 안정을 통해 더 큰 도약을 준비했습니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낡은 시대를 넘어 새로운 시대를 연 삼국의 이야기는, 위기 속에서 미래를 개척해 온 우리 역사의 저력을 보여줍니다.



서기 4세기 초 주요 사건 도표

연도 (서기) 국가 주요 사건 비고
298년 백제, 신라 백제 분서왕, 신라 기림 이사금 즉위 두 나라에 새로운 군주가 등장
300년 고구려 국상 창조리가 봉상왕을 폐위하고 미천왕 옹립 폭군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됨
302년 고구려 현도군(玄菟郡)을 공격하여 멸망시킴 미천왕의 영토 회복 전쟁 시작
304년 백제 분서왕, 낙랑군이 보낸 자객에게 피살됨 이후 비류왕이 즉위하여 안정 정책을 폄
307년 신라 국호를 공식적으로 '신라(新羅)'로 확정함 '덕업일신 망라사방'의 의미를 담음
313년 고구려 낙랑군(樂浪郡)을 완전히 축출함 400여 년 만에 한반도에서 중국 군현 세력 소멸